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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원의 울타리 정보 짱비원 입니다.
주말이나 주일, 연휴가 되면 정말 무서울 정도로 편의점 주변 도로가 한산하고 조용한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날씨를 보이며, 다른 달에 비하여 휴무가 많은 10월도 어느듯 절반이 지나가고 점점 겨울의 문턱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어 편의점 매출까지도 심히 걱정이 되는 시기 입니다.
오늘은 내일로 다가온 부마민주항쟁 기념일에 대하여 간단하게 포스팅을 해 볼까 합니다.
1. 부마민주항쟁 기념일의 의미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직할시와 경상남도 마산시를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의 유신 독재에 반대하여 일어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으로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2019년 9월 17일 부마민주항쟁 발생일인 10월 16일이 국가 법정 기념일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2.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배경
1978년 12월 12일에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을 포함한 무소속에 크게 패배한 민주공화당은 충격을 받아 부가가치세 도입을 주도한 이들에 대한 강한 책임론 물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경질하는 개각을 단행하였으며, 유신정우회의 백두진을 국회의장에 앉히고 국회를 통제하려 하였으나,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회복'의 기치를 든 김영삼(金泳三)이 온건파 였던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로 당선되었고, 강경 대여노선을 취하며 과감한 청와대 투쟁으로 정국은 여야격돌을 맞으며 더욱 경색되었습니다.
그후, 8월에 YH 사건이 일어나면서 신민당은 당사를 노동자들에게 내주었는데, 박정희와 여권은 40시간 이상 당사를 내준 것에 대해 김영삼을 배후로 의심하였고, 공권력을 투입해 민주당사에 들어가 진압하는 과정에서 야당 의원 등과 실랑이를 벌이며, 당시 21세 여공 김경숙 양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 되었고,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신 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크게 고조 되었습니다.
3. 부마민주항쟁의 확산과 종결
이런 가운데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였고,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되면서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는데,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었고, 16일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하면서 ,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 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면서, 정부에서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 하였습니다.
<<참고사항>>
위수령 이란? 육군부대가 한 지구에 주둔하여 당해 지구의 경비, 육군의 질서 및 군기의 감시와 육군에 속하는 건축물과 기타 시설물을 보호할 것을 규정한 대통령령. |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한 10·26사건이 발생하면서 유신 체제는 종결되었는데, 부마민주항쟁은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이념을 계승한 민주항쟁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합니다.
<<참고사항 : 부마민주항쟁 요약일지>>
1979년 5월 3일 :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 정국 여야격돌 심화. 1979년 8월 11일 : YH사건 발생. 1979년 9월 8일 : 김영삼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979년 10월 4일 : 김영삼 의원직 박탈.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 고조. 1979년 10월 13일 :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 사퇴서 제출.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 제기. 1979년 10월 15일 :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 배포. (부산은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 1979년 10월 16일 : 부산에서 5천여 명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시민들이 합세한 대규모 반정부시위 전개. 1979년 10월 17일 : 시위대, 정치 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를 외치며 파출소, 경찰서, 도청, 세무서, 방송국 등을 파괴. 1979년 10월 18일 :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 확산.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 선포. 1천여 명 연행, 66명 군사재판에 회부. 1979년 10월 20일 :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 발동. 군사 출동하여 시위대 중 505명 연행, 59명 군사재판에 회부. 1979년 10월 26일 : 박정희 사망. 국무총리 최규하를 중심으로 한 과도내각 출범. |
4. 포스팅 후기
예나 지금이나 "여소야대"의 국회에서는 협치라는 말 자체가 항상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 거리로 전락하는게 사실이며, 정부와 극심한 대립각으로 민생은 고사하고 정쟁만 일삼는게 국회 본연의 임무라 착각 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투표로 뽑은 대통령마저도 아직까지도 인정을 하지 못하고, 대선불복 프레임을 벌이고 있는 거대야당의 횡포로, 현재 전쟁중에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 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까 불안한 현실 입니다.
내년 22대 총선을 앞두고 극과극의 상황으로 달리고 있는 불안한 정국으로, 호시탐탐 남침 기회만 노리고 있는 북한 김정은 정권의 야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야가 제발 합심하여 이 어려운 안보시국을 넘겨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한 하마스의 위력보다 몇백배나 강한 위력을 갖고있다는 북한의 최신무기들이 언제 어디서 공격을 해올지도 모르는 이 위험천만 불안한 시국에 지금이야 말로 우리 국민 모두가 하나로 똘똘 뭉쳐서 감히 도발의 꿈조차도 꾸지 못하도록 단결된 모습을 보여 줄때라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부마민주항쟁 기념일과 관련하여 아주 간단하게 포스팅을 해 보았습니다.
다소 부족하나마 좋은 참고자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단히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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