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비원의 울타리 정보 짱비원 입니다.
연휴기간 동안 비가 좀 내려서인지 의외로 어제 오늘 구름은 조금 끼었지만 그런데로 좋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어린이 날이 지나가고 그제 어버이 날이 지났지만 5월달은 유난히 가정 관련 기념일이 많은 달로 아직 스승의 날과 성년의 날, 부부의 날 기념일이 남아 있습니다 .
특히 이달에는 우리들 스스로가 가정의 행복과 평화를 위하여 조금씩만 더 양보하고 배려하고 희생하는 마음으로 생활해 주신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또한 지나가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은 하루 앞으로 다가온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에 대하여 간단하고 알기 쉽게 포스팅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란?
1894년(조선 고종 31년) 봉건체제의 개혁과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동학교도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의 지도자들과 농민들로 구성이 되어 발생 되었던 대규모 민중항쟁을 기념하기 위하여 2019년 지정된 국가기념일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을 하고 있습니다.
2. 동학농민혁명의 발생 배경
예로부터 전라도 지방은 이름난 곡창지대가 많고 지리적 경제적인 이점을 지니고 살던 전라도민들은 항상 수탈의 대상이 되었는데, 악랄하기로 소문난 탐관오리 조병갑이 전라 고부군수(현, 정읍시의 일부)로 부임하면서 만석보라는 대형 저수지를 축조하여 그 사용료를 부과하게 되었고, 태인군수를 지낸 아비의 공덕비를 세우겠다는 계획으로 강제노역과 각종 세금을 만들어 거두어 들이고, 무고한 백성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재산을 강탈하는등 온갖 만행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더이상 견디지 못한 고부 고을의 백성들이 학식이 높았던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을 대표로 탄원서를 제출하자 오히려 곤장을 쳐서 죽게 만들었는데, 이에 분노한 그의 아들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첫번째로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조병갑을 처형한다", 두번째로 "전주성을 점령하고 한양으로 상경한다" 라는 매우 포괄적인 봉기계획을 세워서 민란의 시초가 되었으며, 1968년 이 계획서가 사발통문으로 발견 되었다고 합니다.
3. 1차 동학농민혁명의 발발
가. 고부 봉기
전봉준은 1천여명의 고부군민들을 말목장터로 모아 1894년 음력 1월 10일 밤12시 고부성과 고부관아를 습격하고 만석보를 파괴하였으며, 감옥을 부수어 갇혀있던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을 모두 석방하고, 창고에 쌓여있던 곡식과 재물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무기고를 탈취하여 무장하는데 성공하지만, 조병갑은 전주로 도주하게 되며, 이 사건이 동학혁명의 첫 신호탄으로 오랜세월 탐관오리와 양반들에게 짓눌러 왔던 울분이 한꺼번에 폭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보국안민(나라를 어려움에서 구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 을 목표로 봉기한 이들은 농기구와 죽창으로 무장을 하였고 갑작스런 민란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조정에서는 조병갑 후임으로 신임 박원명을 임명하여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고 봉기군을 해산시켰으나, 봉기의 열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조정에서는 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안핵사(조선후기 각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했을때 처리를 위해 파견한 임시직책)이용태를 파견하여 백성들을 달래보려 하였으나, 이용태는 "이것은 다 난리를 일으키는 동학 교도들의 잘못이다"라는 이유로 조정과 동학농민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자기 마음데로 동학교도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빼앗고, 살인을 하며 아녀자를 겁탈하는가 하면, 마을주변에 불까지 지르며 만행을 저지러게 되자 고부백성들의 분노는 걷잡을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 백산 봉기
이용태의 횡포에 격분한 전봉준은 이듬해 3월초 김개남, 손화중등과 함께 손을 잡고 무장현에서 4천명의 봉기군을 규합하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 관련 첫 창의문(倡義文)을 발표하고 고창, 정읍, 태인등지의 농민들을 불러모아 백산으로 집결시키고 4대 강령까지 발표하게 됩니다.
▶동학농민군의 4대 강령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백성의 재물을 빼앗지 말지어다. (不殺人不殺物) 둘째)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다. (忠孝雙全 濟世安民) 셋째) 왜적과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거룩한 길을 밝힐 것이다. (逐滅倭夷 澄淸聖道) 넷째) 군사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여 권귀들을 모두 멸할 것이다. (驅兵入京 盡滅權貴) |
1894년 음력 3월 21일, 백산에 집결한 연합부대는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한양으로 진격하여 부패한 봉건지배세력을 타도하고 외세 침략자들을 몰아 낼것을 제시하며 고통받는 민중과 봉건통치자들의 하수인인 아전까지도 힘을 합해 일어나자는 내용의 격문을 전국에 띄웠는데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백산은 흰옷에 죽창을 든 농민들로 넘쳐났으며,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란 말이 이때 생겨났다고 하네요.
고부와 태인, 무장현 등의 백성들 까지도 합류를 하면서 봉기의 규모는 점점 커지게 되었고,원인을 제공한 이용태는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나자 겁을 먹고 바로 도주하였으며, 이후 파면되고 귀양을 가게됩니다.
다. 황토현 전투
1894년 음력 4월 6일 오후 2시, 황토현에 진을 친 동학군은 전라 감영군과 향병들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되고 전봉준의 동학군은 관군과의 전투끝에 거짓으로 패퇴하여 황토현 인근 사시봉에서 진을 치고 다시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4월 7일 새벽 4시, 동학군의 거짓 패전에 속아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감영군과 친군무남영의 병력이 동학군에게 기습을 당해 완전히 무너지고 관군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며, 다음날 오전 6시 전봉준이 지휘하는 호남 창의군의 총공격으로 영관 이경호가 전사하고 전라 감영군은 전멸 상태가 됩니다.
라. 장성 황룡촌 전투와 진주성 무혈입성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퇴한 전봉준의 호남 창의군은 경군을 유인하여 기습 공격을 하게되며, 장성에 위치한 황룡촌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이 전투에서 대관 이학승이 전사했으며 관군의 신식 무기가 동학군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황토현과 황룡촌에서의 전투로 사기가 충천해 있던 전봉준의 동학군은 1894년 4월 27일 기세를 몰아 파죽지세로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성까지 무혈입성하게되며, 전주성을 지키고 있던 전라감사 김문현은 이미 도주하고 전라도 전역은 완전히 동학군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전주성은 전라북도와 주변 지역의 주요관문이자 한양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며, 조선왕실인 전주 이씨의 본거지라는 점에서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황해도의 황주와 해주, 경상도의 김해, 충청도의 옥천과 회덕, 목천과 보은 등지에서도 동학군의 봉기가 일어났으며, 반대로 농민군을 싫어하는 고을들도 많았는데. 일례로 나주목사 민종렬이 관군은 물론 민보군(民堡軍 :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유생들이 조직한 군대)과 향병대까지 동원해서 동학군을 거부했는가 하면, 전북에서는 남원도 반발하였지만 나주와는 달리 남원은 김개남에 의해 무력 점령 당했다고 하네요.
마. 진주성 탈환과 고종의 청군 파병요청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주성이 함락되자 당황한 조정에서는 완산에 진을 치고 있던 홍계훈으로 하여금 5월 초에 전주성을 공격하여 8일만에 탈환하였는데, 함락이 예상되자 동학군 수뇌부도 미리 도망을 쳤지만 당초 자국군의 역량을 믿지 못한 조정에서는 청나라에게 동학군을 진압할 군대 파병까지 요청 했었다고 하네요.
이와같은 조정의 선택으로 이후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이어지게 되며, 내부 분란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 도움을 요청하면 십중팔구 이용 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이 대륙 진출을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듯 나라를 통채로 갖다 바치는 꼴이 되었다고 하네요.
파병을 적극 찬성하던 민영준은 파병을 반대하는 대신들에게 동학군에 의해 정권을 잃는 것보다는 청나라의 속국이 되더라도 계속 정권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파병 반대를 외치는 대신들을 회유하거나 무력화시켰으며, 또한 민영준은 원세개(청나라 황제)와 비밀리에 접촉하여 청군의 파병을 직접 요청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4.조정과 동학군의 화약으로 휴전
조정에서는 당초 예상과는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자 텐진조약에 의거하여 다급하게 동학군과 화약을 맺고 휴전을 하게되고 청군과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게 되는데 이는 민란이 해결되었을 경우 양국 모두 즉시 병력을 철수하고 잔류하지 못한다 텐진조약의 명기된 약속조항을 따랐던 것이라고 하네요.
조정과 화약을 맺은 동학군은 전주성에서 해산한 후 동학 세력을 점차 다시 늘리게 되었으며, 조정에서는 자발적인 개혁명분으로 교정청(내정 개혁을 위하여 한시적으로 설치되었던 관청)을 설치하고, 농민들은 지방 안정을 위하여 전라도 53개 군에 농민 자치 행정 기구인 집강소를 세우고 민생 안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5. 외세의 내정간섭
민란이 안정되자 조정에서는 청군과 일본군에게 철군하라고 요구했으나, 갑신정변 이후 다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리고 있었던 일본은 좋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우리가 알아본 결과 동학난이 진압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라는 궤변으로 철군 요구를 무시하게되고 조선 주둔을 천명하게 됩니다.
청군은 의외 순종적으로 철군을 준비하였으나, 일본군은 철군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러시아와 영국등 유럽의 중재에도 무시를 해 버렸습니다. 이에, 청의 이홍장이 공동 철수를 제안하였으나 이 역시 단호하게 거부하였고, 오히려 일본은 청에게 함께 조선 내정 개혁을 착수하자고 제안을 하였는데 청은 "동학 난은 이미 다 끝난 상태이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사람들의 몫이지 우리들이 간섭할 권리는 없다."고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자 청에 대한 일본군의 도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경복궁을 무력 점령하고 고종을 압박하여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하는 한편 자주국 선언을 강요했으며, 또한 고종의 이름으로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은 모두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이러한 불미스런 마찰들로 인하여 결국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말았습니다.
6. 2차 동학혁명의 발발
전쟁 와중에 김홍집 내각은 군국 기무처를 설치하고, 1차 갑오개혁을 진행하였으며, 일본에게 유리한 전세로 바꾸자 내정 간섭의 단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에 분노한 동학군은 일본군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동학 농민봉기를 일으킵니다.
일본의 내정 간섭으로 상황이 점점 악화하자 최시형이 이끄는 북접과 전봉준을 이끄는 남접이 협력하여 손병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남접에 합세하게 되면서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지방의 남접군과 손병희 등이 이끄는 경기 남부, 충청 지방의 북접군이 논산에서 만나 10만~20만의 동학 농민군이 결집되었고, 이들은 한성 탈환을 위하여 북상하게 되며, 관군과 일본군이 연합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후 공주에서 벌어진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대패하게되고,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 부대마져 패배하면서 동학군은 사실상 와해되게 됩니다.
농민군은 신식 무기 앞에 속수무책으로 도저히 관군과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으며, 서구식 군사 교육을 받은 일본군의 전술 능력이 동학군 지도부보다 월등히 높아 전략 전술 면에서도 관군과 일본군보다 불리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김개남은 그의 매부 서영기의 집에 숨어있다 잡혀서 전주로 압송되어 바로 참수되었는데, 이는 전라 감사 이도재의 독단으로 당시 법률로는 불법이었다고 하네요. 이러한 이도재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조선 정부는 일본과 마찰이 생겼으며, 일본은 공사를 파견하여 이도재의 독단에 대해 조사하고 처벌을 상의하자 하였으나 다행스럽게도 조선 정부가 감싸면서 이도재는 결국 감봉 3개월의 가벼운 처벌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
금구로 도피한 전봉준은 동학군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1894년 11월 배신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관군에 체포되었고 다른 주모자인 손화중, 최경선, 서장옥 등도 역시 체포되었는데, 자신이 주모하였음을 주장하던 전봉준은 결국 교수형에 처해지며봉기가 시작된지 1년 2개월만인 1895년 음력3월 녹두장군 전봉준의 일기는 막을 내리게 되며, 1년 만에 모든 사건은 종료되었습니다.
2차 봉기는 전국적인 봉기로 황해도에서도 동학군이 봉기하여 해주성을 공략해보았으나 실패하였는데, 이 동학군의 지도자가 바로 김창수,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이며, 황해도에서 민병대를 조직하여 동학군을 토벌한 유력자가 바로 안태훈인데, 안태훈은 김창수가 아까운 인물이라 생각하여 도움을 주었으며, 이후 김구와 안태훈은 좋은 친분을 가지게 되며, 안태훈의 장남이 바로 도마 안중근 의사 입니다..
7. 마지막 항전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고 전봉준, 김개남이 체포된 후 기반을 잃은 동학 농민군은 접주급 이상 지도자 25명이 마지막 항쟁을 결의하고 대둔산으로 피신하여 산세가 험난한 정상부에 요새를 설치하고. 1894년 12월 중순부터 약 석달여간 관군 및 일본군과 치열한 항전을 벌이다가 1895년 2월 18일 포로로 붙잡힌 어린 소년 1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장렬히 전사한 대둔산 전투를 마지막으로 모든 항쟁이 끝이나게 되었습니다.
7. 포스팅 후기
이렇게 극렬하게 봉기하다 최후를 맞은 동학농민혁명군에 대하여는 124년이 지난 2019년 법정 국가기념일로 지정이 되면서 매년 기념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는데 농사를 짓던 일반농민들과 동학교도들이 한데뭉쳐서 탐관오리와 일본의 침략세력에 항전하며 끝까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으며, 우리국민들이 잘 모르고 있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활약상을 이해하시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단히 감사 합니다.
<자료및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나무위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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